풍물놀이의 이해

농경생활이 시작되면서 발달된 풍물놀이는서민들의 오락으로 이들의 삶과 신명이 담겨져 있는 예능이다. 원시사회 때는 신을 부르고 잡귀를 몰아내는 것으로 사람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주술적 기능을 지녔으며, 노래와 춤을 통해 외로움과 아픔을 달래고 기쁨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였다.형태는 꽹과리, 장구, 북, 징, 소고, 태평소, 나발이 함께 연주하는 음악적 요소, 판굿과 풍물재비의 비성형화된 몸짓, 개인놀이에서 보이는 춤적 요소, 잡색을 중심으로 노는 연극적 요소, 우리 민요 가락과 사설 등 여러 요소가 합쳐진 종합적인 표현 매체이다.

풍물놀이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적인 세시풍속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설이나 추석, 단오, 백중 등 큰 명절이 돌아오면 온 마을이 술렁거렸다. 울긋불긋한 고깔에 색스러운 옷을 입고 저마다 악기를 치며 벌이는 풍물놀이는 보기에도 신기하고 흥겨웠다. 한바탕 놀고 나면 집집마다 다니면서 지신 밟기나 고사굿을 해주기도 했다.

농번기가 되면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일꾼들이 논으로 들어가면 풍물패는 흥을 돋우었다. (우리가 흔히 농악이라 하던 것을 1993년 부터 풍물 놀이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풍물패는 맨 앞에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쓴 농기를 앞세우고 꽹과리, 장구, 북, 징, 소고 등의 타악기와 유일한 선율 악기인 태평소를 가지고 여러 가지 장단을 치며 놀이를 한다.

그러나 지방에 따라 쓰이는 악기 종류와 장단 등이 상당히 다르다.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의 <웃다리 풍물>은 꽹과리를 중심으로 가락이 밝고 시원스럽다. 호남과 염남 지방의 <아랫다리 풍물>은 쇳가락보다 장구가락이 많아 유연한 호남지방과 꽹과리를 중심으로 쇳가락이 많아 경쾌하고 씩씩한 느낌을 주는 염남 지방으로 나뉜다. 오늘날에는 풍물 놀이를 재구성해 만든 사물놀이가 일하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 아닌 무대 예술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물놀이의 역사

사물(四物)놀이'가 맨 처음 생긴 것은 1978년 2월의 일이다. 1978년 2월 공간사랑 소극장에서의 공연이 그것이다. 이때 풍물 악기 중 중심이 되는 타악기인 꽹과리, 징, 장구, 북 등 네 개의 악기를 이용해 연주를 하게 되었는데, 그 놀이패의 이름을 민속학자인 심우성이 사물놀이라고 명명해준데서기인하였다.
사물놀이의 창단 멤버는 김용배, 김덕수, 최태현, 이종대였으나 곧 김용배, 김덕수, 최종실, 최종석으로 재구성된다. 이어서 1979년에 김용배,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로 구성되면서 이들은 사물놀이를 일약 세계적으로 음악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1983년에는 김용배가 국립국악원으로 자리를 옮김에 따라 강민석을 영입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덕수가 패의 중심이 되어 왔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김덕수패는 사물놀이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원래 사물은 불교음악에서 나온것으로 법고(法鼓), 범종(梵鐘), 목어(木魚), 운판(雲版)이다. 꽹과리,장구, 북, 징 으로 별,인간,달,해를 상징하고,그 소리는 번개, 비,구름,바람 소리레 비유하기도 한다 이 네개의 악기를 가지고 인간이 소리를 내면 네개의 악기로 부터의 진동이 어우러지고 화합하여 "소리의 공간"을 이루게 된다. 이는 천지인의 삼재사상을 받들어 온 우리 선조들이 남겨놓은 소리의 유산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으로 많은 민속음악이 이 사물의 소리를 바탕으로 두고 있다. 이 네개의 악기를 잘 살펴보면 , 쇠는 시간을 소리로 다져내고, 북은 이를 몇개의 그룹으로 갈라내며, 장고는 그사이를 채워나간다. 징은 몇개의 소리 무더기를 크게 휘감아 하나의 소리공간을 이루게 해준다. 사물은 무속음악과 농악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악기들이었으나, 양자 모두가 오랜 세월동안 시각적인 예술로서의 성격이 더 강했기 때문에 그 장단만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누구나 별로 주의깊게 관찰해 오지 않았었다. 따 라서 시각적 요소를 배제시킨 사물의 순수한 연주를 통한 소리의 세계는 누구에게나 새로운 체험일수밖에 없었으며 소리 위주의 음악예술에 익숙해 있는 현대무대에 사물놀이가 이러한 우리의 예  술을 재현함으로써 비로서 그 우수성을 확연히 인정받게 된 것이다.

 

악기의 특징

                                                         
 

 꽹과리
꽹과리는 쇠, 매구, 깽매기, 깽쇠, 광쇠, 꽝쇠, 소금(小金), 동고, 쟁 따위로 불리며 흔히 꽹과리를 치는 사람을 쇠치는 사람(쇠치배)이라고 부른다. 앞치배들 가운데 맨 앞에서 쇠를 치는 사람을 '상쇠'라 하는데,상쇠는 풍물굿패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쇠는 놋쇠를 원료로 만드는데, 요즈음에는 금이나 은을 섞어 쓰기도 한다. 놋쇠는 구리와 아연을 섞어서 만든 것으로 구리의 합금 비율이 높으면(60∼70%) 소리가 높고 맑게 나지만, 아연의 합금비율이 높거나 납을 섞어서 만들면 소리가 낮고 탁하게 나며 울림이 헤퍼서 오래 가지 않는다. 꽹과리의 크기는 지름이 대략 21cm(7치), 둘레 부분은 높이가 3.6cm(1치 2푼) 정도이다. 쇠채로 쇠의 가운데와 전두리 (쇠의 테두리) 사이를 친다.

꽹과리 채의 길이와 크기도 지역이나 굿을 치는 목적에 따라 다르다. 특이한 것은 경북 빗내 진굿의 쇠채는 다듬이 방망이를 쇠채 모양으로 깎아서 만들어 쓰기도 하며, 옛날 어른들은 북채나 막대기로 쇠를 치기도 하였다. 쇠를 칠 때는 한 손 (오른손잡이는 오른손에 해당함)에 쇠채를 잡고 쇠를 쳐서 소리를 내고, 한 손은 쇠를 잡고 중지, 약지, 무명지를 쇠에 대었다 떼면서 쇠소리의 깊고 얕음과 음색조절을 한다. 음색에 따라 수꽹과리, 암꽹과리로 나뉘는데 수꽹과리는 소리가 야물고 높으며 암꽹과리는 소리가 부드럽고 얕다. 수쇠와 암쇠가 서로 받아치며 하는 놀이는 마치 암새와 수새가 서로 이야기하듯 소리가 잘 어울린다. 꽹과리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신라시대 때 만들어진 듯하고, 다른 한 가지는 고려 공민왕 때 주나라에서 만들어져 중국 명나라 때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꽹과리는 장구와 아울러 율동악기로서 으뜸인데 옛날에는 군악이나 정악, 무악, 풍물굿 등 두루 쓰였으나,풍물굿에서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가락으로 사람의 느낌을 고조시키고 흥을 돋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쇠로 만드는 타악기의 하나로 본래의 소리는 '정'(鉦)이나 징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옛 군악인 고취악에서 쓰던 까닭으로 고취징이라는 별명도 있고, 그 밖에 나, 금라(金羅), 금(金), 대금(大金), 금정(金鉦) 등의 이름이 있다.
쓰임새는 넓어서 군악의 행진곡을 비롯한 무악과 풍물굿 등에 쓰이며 절에서도 쓰인다.

징은 고려 공민왕 때 중국 명나라에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고,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회 박물관에 있는 고려시대의 징으로 보아 징의 역사는 고려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보인다. 아울러 그 쓰임의 단순함으로 미루어 볼 때, 꽹과리보다 먼저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 징의 울림이 직선적으로 하강하는 느낌을 주는 것은 좋지 않고, 울림이 몇 고개를 넘어서 끝이 올라가서 맺는 것이 좋다.

징의 크기는 대략 지름이 약 36cm, 둘레의 높이는 10cm이며, 징의 쇠 두께는 3mm 정도이다. 징은 장단을 바르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사물의 가락(쇠, 장구, 북, 소고)을 모두 감싸서 멀리 울려 퍼지게 한다. 풍물굿 악기 가운데 가장 은은한 소리를 내며 포용력이 있는 악기라 할 수 있다. 징을 칠 때는 징 채를 짧게 잡고 징의 한가운데를 부드럽게 밀듯이 쳐야 소리가 되바라지지 않고 웅장한 소리를 낸다. 징은 연주가 다양하지 못한 단점이 있으나 바로 그런 이유로 발림이 다양하고 여유가 있어 춤으로 신명을 표 출하기가 좋다. 징을 치는 횟수에 비해 그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징이 정확한 박으로 제대로 받쳐 주지 못하면 다른 치배의 장단이 어지러워지고 불안하며, 장구나 쇠, 북 모두가 제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다. 옛날에는 징을나무틀(ㅏ자모양)에 걸고, 그 나무틀을 왼쪽 몸에 대고 끈으로 묶어서 다니기도 하였다

장구
죽 타악기의 하나로 양편 머리가 크고 그 허리가 가늘다 하여 세요고(細要鼓)라고도 한다. 이름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으나, 한자로 지팡이장(杖)과 북고(鼓)를 쓰면 장고가 맞고, 노루장(獐)과 개구(拘)를 쓰면 장구도 맞다. 풍물의 현장을 조사하는 가운데, 전북 진안 김봉열 선생님과 강원도 강릉 박기하 선생님도 옛날부터 어른들께서 장구의 가죽을 노루가죽과 개가죽으로 썼다 하여 장구가 맞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보통 장구라고 많이 부른다. 여기서도 장구로 통일해서 부르기로 하였다.

왼쪽(북편, 궁편)은 말가죽이나 소가죽, 노루가죽을 대 가죽이 좀 두껍고 소리가 낮으며, 오른쪽(채편)은 보통 말까죽이나 개가죽을 대 가죽이 얇고 높은 소리를 낸다. 가죽으로는 개가죽이 소리도 크고 제일 좋다. 장구의 통은 사기, 기와, 쇠, 나무, 바가지, 양철 따위를 쓰는데, 보통 미루나무와 오동나무를 많이 쓰고, 오동나무가 가벼우며 소리도 좋다.

장구통의 궁통과 채통을 이어 주는 곳을 조롱목이라 하는데, 조롱목이 너무 넓으면 소리가 헤프고, 조롱목이 너무 좁으면 소리가 되바라진다. 장구통을 만드는 방법에 따라 통째로 깎아 만든 통장구와 나무조각을 깎아서 보통 두 쪽 내지 세 쪽으로 맞춘 쪽장구가 있다. 철테(원철) 둘레에 8개의 쇠고리(쇠갈고리, 구철)를 걸어 무명을 꼬아 만든 줄(숫바, 홍진사, 축승)로 얽어 매고, 죔줄(축수, 부전)을 좌우로 움직여 소리를 조절한다.

장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 문종 30년(1076년)에 대악관현방(大樂菅絃房)을 정할 때 장고업사 (杖鼓業師 : 장구 연주자라는 뜻)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장구보다 작은 크기의 장구를 요고(腰鼓)라
하고 인도에서 만들어져 중국 남북조 시대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하며, 고구려 집안현 제4호 무덤벽화와 신라 상원사 동종의 아래쪽에 그려진 주악도, 그리고 감은사지 청동제 사리기 기단에 그려진 그림(통일신라 신문왕 2년, 682년)에서 볼 수 있다.

장구가 요즘에 쓰이는 형태로 크기가 커진 것은 고려 때로 추측되며, 장구가 중국에서 만들어져 우리나라로 전해진 것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중국 한 무제 때 만들어져 고려 예종왕 9년 송나라에서 새로운 악기가 들어올 때 장고이십면(杖鼓二十面)이 포함된 기록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장구가 중국 당나라 때부터 쓰여 고려 때 들어왔다는 견해가 있다.『고려사악지』의 [당악기조], [향악기조]에 각각 장고가 들어 있고, 조선 세종 때 『악학궤범』 에 의하면 장구 (장고라 쓰였지만 여기서는 장구로 통일함)가 당악과 향악에 어울려 쓴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장구는 처음에 당악 (당에서 들어온 음악), 향악(옛날부터 내려오는 우리의 음악)에 쓰였으며 지금은 정악, 산조, 잡가, 민요, 풍물굿, 무악 등 거의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장구의 옛날 꼴로 생각되는 물장구, 모래장구도 있었다고 한다. 장구의 채로는 궁채(궁글채)와 열채(가락채)가 있는데, 궁채는 대나무 뿌리를 잘 삶아서 똑바로 편 다음, 끝부분에 박달나무와 같이 단단한 나무 또는 뿔을 끼워서 만들고, 열채는 대나무를 깎아서 만든다. 두 손으로 치기 때문에 가장 다양한 소리를 내 어깨춤이 절로 나게 만든다. 분위기를 흐드러지게 하고 풍성하게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악기이며, 민요나 춤 장단을 칠 때는 궁편을 손으로 치기도 한다. 장구를 메는 방법도 지역이나 사람마다 다르고, 그 나름의 맛을 제각기 갖고 있다.


꾸밈새가 간단한 까닭으로 그 역사가 오래되고 세계 어디에서나 그 발생을 볼 수 있으며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며 발달했다. 곳과 쓰임에 따라서 여러 가지 종류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풍물굿의 악기 가운데에서 북은 가장 오래된 악기다.

그 까닭은 청동기시대 이전의 목축시대에 만들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악기기 때문이다.

풍물굿에 쓰이는 북은 어깨에 메기가 간편하고 소리가 옹골찬 것을 주로 쓴다. 오동나무나 미루나무의 가운데를 파내고 양편에 소가죽이나 말가죽을 대고 양쪽 가죽을 줄로 엮고 조여서 만든다. 요즘은 나무판을 엮어서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다.

북은 잔가락을 운영하는 것이 주가 아니므로 다양한 가락의 연주보다는 박을 힘있게 짚어 가면서 그 기상을힘찬 춤으로 펼쳐 나간다.

북은 치는 방법에 따라 보통 왼쪽 어깨에 메고 치는 외북과, 북을 허리에 북끈으로 고정시키고 두 손에 두 개의 북채를 잡고 치는 쌍북이 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춤 위주의 외북을 치고, 쌍북은 상대적으로 가락에 치중한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장구가 발달하여 북소리를 장구의 궁편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으나, 경상도에서는 북이 발달하여 장구의 역할이 감소한다. 따라서 북놀음이나 북가락은 경상도 지방에서 많이 발달되었으며, 전남 진도의 북춤 에서는 두 손에 북채를 들고 추는 춤사위가 뛰어나다. 북의 크기도 곳에 따라 다르다. 대체로 경상도 북은 크고 넓으며 전라도 북은 작은 편이다. 북치는 사람의 자리도 경상도에서는 꽹과리, 징 다음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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